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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판을 결심하기 전 아직 신혼인 우리 부부는 동해안 낙산의 철이른 바닷가에 있었다.
결혼한 지 석 달 만에 그만둬 버린 전 직장 그리고 이제 갓 두세 종 출판한 우리 출판사가 인수자를
찾고 있을 때였다. 그동안 자금을 대오던 출자자가 당시 편집장으로 있던 나까지 끼워 딴 데로 넘기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였는데 끝내 인수자가 나오지 않으면 공중분해될 절대절명의 위기상황이었다.
당시는 봉급도 몇 달치 나오지 않아 아내가 아는 몇몇 출판사에서 교정지를 받아다 아르바이트해서
생계를 이어가던 궁핍한 시절이었다. 그때 우리 부부는 오색약수터 부근 민박집에서 이박삼일 민박을 했는데 산과 바다를 오가며 중대한 결심을 해야 했다. 출범한 지 일 년도 안돼 좌초 위기를 맞은
눈빛출판사를 살려야 하느냐 아니면 다른 곳에 취직을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많은 고민을 했다.
사진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또 사진계를 잘 아는 것도 아닌데 단순히 책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이 출판사를 맡기는 힘들어 보였다. 인수자금도 부족하고 앞으로 책을 내려면 많은 재정이 필요할 텐데
난감했다. 내 현실적 능력으로는 출판사를 인수하는 것보다 차라리 낙산해수욕장 모래알 수를 헤아리는 편이 더 나아 보였다. 내면의 요구와 현실적 조건들이 상충하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이다.
짙푸른 바다가 곁에서 출렁거리고 있었지만 오월의 뜨거운 백사장은 마치 사막과 같았다.
그 사막 위에서 내게 용기와 신뢰를 준 사람은 아내였다.

“당신이 한번 해보지요. 뭐…….”

거의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겠다고 가닥을 잡아가고 있는데 아내가 말했다. 아직은 젊고 당신은 누구 밑에서 일할 사람이 아니니 당신이 맡아 해보라는 것이었다. 편안한 현실의 길을 찾아가느냐 아니면 모험을 하느냐 하는 기로에서 아내가 오히려 내게 모험의 길을 제시했다. 아! 세상의 어린 가장들이여. 절대 아내 앞에서 좌절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지어다.

다음날 상경해서 아내가 나 모르게 부어 오던 정기적금을 해약해서 그것을 종자돈으로 지금의
눈빛출판사를 인수했다. 당시의 출자자도 창업 초기부터 일해 온 내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또 인수금의 대부분을 고맙게도 일 년간 유예해 주기도 했다. 그 출자자를 지금도 가끔 만나는데 만날 때마다 그는, 당시 사진출판에 자신이 없었고, 그 짐을 자네에게 떠넘겨 미안하다고 말하곤 한다.
1980년대 후반의 사진출판은 아주 미미한 것이었다. 기껏해야 기술서들과 자비출판한 사진집 몇 종이 고작이었는데 서점에서도 지금과 같이 사진 코너로 서가가 분류되어 있지 않았다. 서가도 미술 코너
한쪽을 사용할 뿐이었다. 요즘은 웬만한 중대형 서점이면 사진 코너가 따로 설치되어 있고, 사진출판물도 훨씬 다양해져서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이다.
초기에는 사진집이나 이론서 1천부를 발행하면 3-5백부 정도 판매되고 나머지는 재고로 누적되었다. 사무실 한쪽을 판자로 막아 창고로 사용했는데 나중에는 창고가 비좁아 사무 공간까지 책이 점령할
정도였다. 요즘도 발행부수는 비슷하지만 대개의 사진책들이 빠르면 일 년을 기점으로 재판에 돌입하게 되니 그동안 독자가 많이 늘어 왔다 할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사진출판물을 찾는 일반인들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데 반해 사진계에서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영역에서 사진전문 출판물을 외면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 해 사진을 전공하고
졸업하는 학생이 2천여 명선을 돌파했다는데 아무래도 그들은 아직도 책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지난 십오 년간 나는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사진책들과 함께해 왔다. 책을 팔아 책만 만들어
왔으므로 우리의 책들은 결국 독자들이 만들어 온 것이나 다름없다. 낙산 해변에서의 결심 이후 나는 이 모진 현실을 피하지 않고 관통해 왔으며, 그 중심에 사진이 있었던 것에 언제나 감사한다.
올가을에 나는 아무래도 아내와 함께 낙산 해변에 다시 가봐야겠다.

(이 칼럼은 '월간 포토넷' 2004년 10월호에서도 만나실 수 있습니다.)


2004-10-14 | 이규상 | 눈빛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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